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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래시
    카테고리 없음 2019. 12. 29.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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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 '백래시(backlash)'라는 단어를 종종 듣는다.
    이 용어는 기계 전공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이다. 나사나 기어 등과 같이 상호 맞물려 작동하는 기계요소에는 힘을 전달하기 위해 서로 접촉하는 곳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불가피하게 약간의 여유 틈새가 존재하게 되는데, 이를 백래시라 부른다. 이 백래시가 없으면 상호 자유로운 움직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기어와 같은 기계요소의 설계나 가공에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구동측과 피동측이 항상 정해져 있으면 작용점과 피작용점이 언제나 접촉하여 있으므로, 백래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어나 나사가 역방향으로 회전하거나 피동측이 앞서가려고 하는 등 구동력에 변화가 발생하면, 틈새를 형성한 백래시가 문제를 일으킨다. 그 간격만큼 동력전달이 중지되고, 백래시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양측은 충격적으로 부딪히며 접촉하게 된다. 이는 소음과 진동을 발생시키고 심하면 균열이나 파손이 일어나 수명을 저하시키기에, 엔지니어들은 가능한한 백래시를 줄이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백래시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백래시는 
        - 구동측과 피동측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된 간격이다.
        - 구동측의 이끄는 힘이 피동측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필요하다.
        - 작용력 흐름의 변화나 구동과 피동의 역할이 바뀔 때, 소음 발생이나 시스템 파괴의 원인이 된다.
        - 그래서 가능한한 가장 최소로 유지되도록 부단히 관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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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의미 때문에, '백래시'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최근 자주 인용되고 있다.
    사회는 경제적,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나름의 흐름이 존재한다. 그 흐름에는 흐름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소위 구동측과 그 흐름에 이끌려가는 피동측이 있고, 그 양쪽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사이를 완충하는 틈새(갭)가 있다. 이 틈새를 사회적 '백래시'라 부를 수 있다. 이 백래시에 의해 갑을 관계, 노사 관계, 빈부 격차, 정치성향 등이 사실상 구분되는 셈이다. 

    이 백래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변화가 급격히 일어날 때이다. 사회를 이끄는 주도적 세력의 힘이 약화되거나 새로운 사회적 에너지가 증폭될 때, 기존의 이끌려가던 집단이 변화를 주도하는 상황으로 역전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계에서 피구동측의 역할이 뒤바뀔 때와 같이, 사회적 백래시가 잡음을 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흑인 인권, 페미니즘 등이 대두되면, 그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질서에 익숙하여 있던 기득권 집단이 변화를 거부하며 반발하는 현상을 사회적 '백래시'라 부른다.

    우리는 수많은 사회적 '백래시'의 잡음을 보고 경험하면서, 지금의 변화된 사회 상태를 누리고 있다. 예를 들어 '야간통금 폐지하면 안보가 불안하다', '두발 자유화는 교육을 파괴시킨다', '주5일제로 나라 경제가 망한다.' 등의 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아련하다. 최근에는 '군대에 휴대전화를 허용하면 군대가 개판된다', '주52시간제가 제조 기업들의 탈한국을 조장할 것이다', '선거 연령이 18세로 낮아지면 고3 교실이 정치판이 될 것이다', '공수처법은 어쩌고어쩌고..' 등의 백래시를 듣고 있다. 이런 말들도 머지않아 추억 속의 소리로 사라져갈 것이다.

    '백래시'는 작게는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마찰과 불화의 원인이 된다. 젊은 자녀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주체가 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집안을 통제하려고 꼰대들의 잔소리는 커지고 집안이 시끄러워지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소원해진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핵심역량의 변화를 드라이브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그에 저항하여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고자 하는 수구 세력의 백래시도 만만치 않다. 기업의 백래시는 결국 그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여하튼 세상은 꾸준히 변화하고, 모든 변화에는 항상 백래시가 존재한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날마다 수많은 백래시의 잡음을 듣고, 각자 스스로도 누군가가 이끄는 변화에 저항하며 백래시 잡음을 생성하여 보탠다.
    그렇게 하면서, 역사는 세상을 어지럽힌 수많은 '백래시'들을 흘러간 헛소리로 만들어버리며, 새로운 사회 모습을 구축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백래시는 그저 잡음에 불과한 것이라 치부할 게 아니다. 백래시의 소리는 세상의 변화를 널리 웅변으로 알려주는 고적대의 나팔소리라 할 것이다.



    * (참고 상식)

    '백래시'는 낚시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릴을 던져 낚시줄을 풀 때, 낚시줄을 감고 있는 스풀의 회전 속도가 줄이 풀려나가는 속도보다 더 빨라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과속으로 회전하는 스풀에 이미 풀려나간 낚시줄이 오히려 역방향으로 감겨버려 줄이 엉망으로 꼬이게 된다. 이를 낚시에서 '백래시'라 부른다.
    연날리기 할 때에도 마찬가지의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연이 바람을 타고 상승할 때 얼레의 가속도를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백래시'가 발생하여 실을 망쳐버리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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